1882년 여름, 한양 도성은 13개월 동안 월급(군료)을 받지 못해 굶주림에 허덕이던 군인들의 분노로 불타올랐습니다. 간신히 손에 쥔 쌀자루를 열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썩은 쌀알과 뒤섞인 모래와 겨뿐이었습니다.
개항 이후 추진된 급격한 개화 정책의 그늘 속에서 터져 나온 임오군란(壬午軍亂), 구식 군인의 단순한 폭동을 넘어 청나라와 일본의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불러오며 한반도를 열강의 격전지로 몰아넣은 1882년의 비극을 3가지 핵심 주제로 짚어봅니다.

1. 차별 대우의 뇌란 : 신식 군대 별기군과 굶주린 구식 군인
강화도 조약 이후 고종 정권은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며 1881년 최초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습니다. 양반 자제들로 구성된 별기군은 일본의 교관(호리모토 소위)에게 신식 훈련을 받았고, 좋은 제복과 높은 급료를 받으며 특별 대우를 누렸습니다.
- 구식 군인의 몰락 : 반면 5군영에서 2 영(무위영·장어영)으로 축소된 구식 군인들은 찬밥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일자리를 잃은 군인이 부지기수였고, 남아 있는 군인들마저 무려 13개월 동안 급료를 한 톨도 받지 못해 가족과 함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도화선이 된 모래 섞인 쌀 : 마침내 전라도에서 세곡선이 도착해 한 달 치 급료가 지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하수인들은 쌀을 착복하고 부피를 불리기 위해 썩은 쌀에 모래와 겨를 섞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굶주림의 한계를 다다른 구식 군인 김춘과 유복만 등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관리를 폭행하며 군란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2. 한양을 뒤흔든 봉기 : 궁궐 난입과 대원군의 일시적 재집권
주동자들이 포도청에 갇히고 사형 위기에 처하자, 구식 군인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하여 조직적인 봉기에 나섰습니다. 여기에 개항 이후 쌀값 폭등과 세금 수탈로 고통받던 한양의 도시 빈민들까지 대거 가세했습니다.
- 민 씨 척족과 일본인 처단 : 분노한 군민들은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된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을 파괴하고,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를 살해했으며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불태웠습니다.
- 창덕궁 난입과 명성황후의 탈출 : 군인들은 마침내 궁궐(창덕궁)까지 난입하여 민겸호 등을 처단하고 명성황후를 수색했습니다.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뒤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습니다.
- 흥선대원군의 귀한 : 궁지에 몰린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실각했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습니다. 권력을 되찾은 대원군은 별기군을 폐지하고 5 군영을 부활시켰으며, 명성황후의 국시(사망)를 공식 선포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3. 청나라의 군사 개입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 심화된 내정간섭
그러나 대원군의 재집권은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충주에 피신해 있던 명성황후와 민 씨 일족이 청나라에 비밀리에 원병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 대원군의 납치와 청군의 주둔 :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과시하고 일본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오장경과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이끄는 3,000여 명의 대군을 파견했습니다. 청군은 대원군을 난의 주모자로 몰아 청나라 텐진으로 강제 납치해 유폐시켰습니다.
-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 : 청나라는 군란 진압 대가로 조선을 실질적인 속국으로 규정하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강요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 상인은 양화진(서울)과 한양 내륙까지 진출해 자유롭게 상점을 열 수 있는 특권을 얻었고, 조선의 전통 상권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 제물포 조약과 일본의 군대 주둔 : 한편 일본 역시 공사관 피습을 빌미로 군함을 끌고 와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막대한 배상금을 뜯어내는 것은 물론, 일본 공사관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일본 경비병의 한양 주둔권을 획득했습니다.
마무리 : 썩은 쌀 한 줌이 불러온 열강의 각축장
임오군란은 차별과 굶주림에 내몰린 군인들과 민초들이 부패한 지배층을 향해 터뜨린 절박한 생존권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배층이 권력 유지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면서, 사태는 민족의 자주권을 크게 훼손하는 비극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한양 한복판에 청나라 군대아 일본 군대가 나란히 주둔하게 되었고, 조선은 두 외세가 서로의 목을 겨누는 위태로운 전장으로 변모했습니다. 내부의 곪은 환부를 자주적으로 치유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탁했을 때 어떠한 참담한 결과를 낳는지, 1882년의 여름은 우리 역사에 뼈아픈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