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대포 소리와 함께 다가온 제국주의의 그림자
19세기 후반 한반도 연안에는 이전에 본 적 없던 거대한 검은 선박들이 잇따라 출몰했습니다. 돛을 달고 증기를 뿜으며 바다를 가르는 서양의 전함, 즉 이양선(異樣船)이었습니다. 동아시아 전체가 서구 열강의 무력 침략 앞에 차례로 문을 열던 격동의 시기, 조선 역시 역사의 거대한 갈림길에 마주 섰습니다.
당시 조선의 최고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으 서구 세력의 통상 요구를 단순한 무역 교섭이 아닌, 성리학적 유교 질서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침략으로 규정했습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탈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미국 함대가 포격을 퍼부은 신미양요(辛未洋擾)는 500년 은둔의 왕국 조선이 서구 열강과 정면으로 부딪친 최초의 근대적 충돌이었습니다.
강화도의 흙탕물과 포연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국토를 지켜낸 조선 군민들의 결사항전, 그리고 그 포화의 끝에서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斥和碑)의 역사적 명암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1 :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 프랑스
함대와 외규장각의 약탈
병인양요의 발단은 흥선대원군 정권이 단행한 천주교 대탄압인 병인박해(1866년)였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해 수천 명의 천주교신자가 처형당하자, 살아남은 리델 신부가 청나라 톈진으로 탈출해 프랑스 동양함대 사랑관 로즈(Roze) 제독에게 이를 알렸습니다.
1)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점령
1866년 10월,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7척과 약 600명의 해병대가 자국민 학살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이들은 한양으로 통하는 수로의 관문인 강화도를 전격 기습하여 강화산성을 점령하고 관아와 군사 기지를 불태웠습니다.
2) 문수상성과 정족산성의 반격
조선 조성은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해 정예 포수들을 급파했습니다.
- 문수산성 전투 :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이 통진 문수산성에서 진격하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버려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 정족산성(삼랑성)의 쾌거 :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포수 부대는 야간을 틈타 비밀리에 강화도로 건너가 정족산성에 매복했습니다. 성을 공격해 들어오던 프랑스 정예 해병대를 상대로 기습 사격을 가해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주시켰습니다.
결국 로즈 제독은 지구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퇴각 과정에서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을 불태우고, 왕실의 핵심 기록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의궤를 비롯한 은괴와 귀중 도서 수천 권을 무단 약탈해 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본론 2 :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 광성보의 결사항전과 어재연 장군
병인양요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태평양을 건너온 미합중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 앞바다에 닻을 내렸습니다.
1)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미국의 침공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약탈을 자행하다 평양 감사 박규수와 평양 군민들에게 불태워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Gerneral Sherman) 사건이 도화선이었습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배상과 조선의 개상(조미 통상 조약 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1871년 5월, 로저스(Rodegers) 제독이 지휘하는 군함 5척과 1,200여 명의 육전대를 파견했습니다.
2) 광성보 전투와 조선군의 장렬한 최후
미 해병대는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한 뒤, 조선군의 최후 방어선인 광성보(廣城堡)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 장군과 병사들은 압도적인 화력 차이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미군의 신식 후미장전식 소총과 함포 사격 앞에 조선군의 구식활과 화승총은 역부족이었습니다.
탄약이 떨어지자 조선 병사들은 맨손으로 칼과 창을 휘둘렀고, 흙과 돌을 집어던지며 육탄전을 벌였습니다.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 350여 명이 전사하며 끝까지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미군 사령관의 수우기를 빼앗기고 전원이 장렬히 산화한 이 전투는 미 해군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근접 육탄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미국은 승리했으나 결사항전의 기세에 질려 통상 요구를 포기한 채 결국 스스로 닻을 올리고 물러났습니다.
본론 3 : 전국에 새겨진 쇄국의 결의, 척화비(斥和碑)의 건립
두 번의 양요(洋擾, 서양 오랑캐의 소란)를 거치며 서양 군대를 끝내 물리쳤다고 판단한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습니다.
1) 척화비의 문구와 의미
1871년, 대원군은 종로 보신각 앞을 비롯해 전국 팔도의 주요 교통로와 관아 앞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척화비(斥和碑)입니다. 비석의 앞면에는 다음과 같은 결연한 12글자가 새겨졌습니다.
- "戒吾萬年子孫(계오만년자손)-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계하노라"
- "洋夷侵犯 非戰則和 和則賣國(양이침법 비전즉화 화즉매국)-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2) 쇄국이 남긴 빛과 그림자
척화비는 제국주의 열강의 무력 침탈로부터 자주성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내겠다는 국가적 저항의 결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계사의 거대한 산업화와 근대화 조류를 '사악한 양이(洋夷)'의 것으로만 치부하여 문을 걸어 잠금으로써, 조선이 근대적 기술과 제도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천금 같은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든 양날의 검이기도 했습니다.
결론 : 흙과 피로 지켜낸 자주, 그리고 닫힌 문 너머의 세계
강화도의 차가운 갯벌 위에서 포탄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한성근, 양헌수, 어재연 장군과 이름 없는 수백 명 포수들의 희생은 침략자에 굴복하지 않은 조선 민초들의 위대한 애국혼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을 물리쳤다는 승리감 뒤편에서 세워진 척화비는, 다가오는 거센 근대의 격량을 막아내기엔 너무나 위태로운 돌기둥이었습니다. 불과 몇 년 뒤인 1876년, 조선은 서구가 아닌 또 다른 침략자인 일본의 운요호 사건에 밀려 준비되지 못한 불평등 조약(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열어야 했습니다.
포화 속에서 피어난 결사항전의 용기와 시대를 읽지 못했던 쇄국의 한계는, 오늘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자주와 개방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묵직하게 일깨워 줍니다.
마무리 : 핵심 요약정리
| 구분 | 병인양요(1866년) | 신미양요(1871년) |
| 상대 국가 및 원인 | 프랑스(프랑스 신부 처형 등 병인박해 보복) | 미국(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소각 사건 문책) |
| 주요 전장 및 영웅 | 통진 문수산성(한성근), 강화 정족산성(양헌수) | 초지진·덕진진 함락, 강화 광성보 결사항전(어재연) |
| 국가적 피해 | 강화산성 파괴, 외규장각 도서(조선왕조의궤) 약탈 | 광성보 수우기 피탈, 350여 명 전사 |
| 결과적 퇴각 원인 | 양헌수 장군의 기습 매복에 막혀 프랑스군 퇴각 | 조선군의 옥쇄 결사항전으로 통상 포기 후 미군 철수 |
| 역사적 귀결 | 흥선대원군의 쇄국 결의 고조 ☞ 전국 척화비 건립과 통상수교 거부 정책 완성 |